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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눈물, 천개의 일상 - 물(水)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어라.

김노암(아트스페이스 휴 대표)

이미지는 작가의 내면으로 물처럼 바람처럼 스며들고 휘돌며 세계의 외면으로 솟아오르기를 반복한다. 세계의 부조리와 만난다. 견디지 못하는 그녀의 촉각은 매번 사회와 자신을 연결하는 이미지로 답하려고 노력한다. 창작자로서 지니는 미적 윤리이다. 나르시즘에 빠지고, 나르시즘에서 벗어나는 이중의 운동이 작가 내면에서 충돌하고 회전한다. 

 

송창애 작가의 프로젝트 [천개의 일상]은 소셜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작가와 연결되어 있는 1,000명의 시민이 2015년, 2016년, 2017년 3년 동안 매년 4월 16일, 단 하루 동안 ‘나의 일상’을 주제로 1장의 디지털 사진을 찍고 모으는 프로젝트이다. 작가는 이렇게 모인 1,000명의 일상 이미지를 [천개의 눈물]이라는 물방울 이미지 1,000점과 디지털 이미지로 1:1 매치하여 작가가 느끼고 해석하는 사회적 풍경을 구성하는 프로젝트이다. 작가는 ‘공감과 소통’을 화두로 하여 작가 자신은 물론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각자의 상처(트라우마)를 연결하고 사유한다. 

 

나는 내 트라우마를 타인들의 트라우마와 연결하고 사유하려 한다. 나는 1,000명의 다양한 삶의 단면을 ‘물’의 운동으로 표현하여 유기적 삶을 말하려 한다. 사람들은 사회의 네트워크 속에서 연결되어 성장하고 진화하며 살아간다. 이번 [천개의 일상]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간의 관점을 통해 자신을 비춰보고 오늘날 삶 속에서 ‘관계’의 의미를 성찰하는 프로젝트이다. - 작가노트

 

한국 사회를 뒤흔든 ‘세월호의 비극’. 마치 프랑스 낭만주의화가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의 뗏목’처럼 송창애 작가는 시대의 비극적 사건을 자신의 내면의 사건으로 수용한다. 또한 자기 존재의 근본적 의미에 대해 집요하게 고뇌하도록 부추긴다. 사회의 트라우마는 개인의 트라우마가 된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송창애 작가는 천개의 드로잉을 제작하여 씻김굿을 하듯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예술과 이미지를 통한 제의적 퍼포먼스가 작동하는데, 이는 개인의 활동이 아니라 집합적 활동이 된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은 미덕이다. 특히 슬픔을 공감하고 나눈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많은 잘못과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삶과 문화를 만드는 데 가장 근원적인 에너지였다. 인간이 공감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바로 그 공감과 소통의 힘을 통해 수많은 갈등과 불화, 테러와 전쟁을 겪으면서도 인간이 스스로의 자존감을 잃지 않고 선하고 숭고한 비전을 설정하고 나아갔다고 역사는 말한다.  

 

그러면 왜 ‘일상’이 중요한 것인가. 작가는 왜 ‘일상’을 화두로 삼는 것일까? 그것은 일상이라는 특별하지 않은 습관적이고 별 의미 없는 시간과 행위와 관계가 조직되어 거대한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크게 주목하지 않은 판단과 행위가 실상 거대한 인류의 역사를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동한다. 가시적이며 큰 권력 이상으로 잘 살펴보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미시적인 힘들이 무수히 작용하여 세상을 바꾼다. 익명의 노동자들의 노동이 인류 문명을 건설하는 동력이건처럼. 무수히 많은 익명의 시민들의 힘이 모이고 공감의 연대가 가시화 되며 마침내 구체적인 행위로 연결되는 것은 사회의 일반적 법칙이기도 하다. 사회철학자들이 말한 현실은 곧 일상이라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삶이 주조되는 일상이 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예술이 곧 진실은 아닐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예술에는 진실이 들어있다. 그러나 창작의 현장에서 예술가들이 느끼는 딜레마는 일반적인 일상과 현실을 생산하고 움직이는 활동과는 변별되는 소모적이며 헛짓으로 쉽게 치부되는 예술 활동이 삶의 진실과 동떨어져서는 환경과 사회적 조건의 급격한 변화와 유리되어 무력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직접적이지도 않고 반응속도도 떨어지는 활동에서 어떤 진실을 담아낼 수 있을까. 비록 진실을 담고 있다하더라도 이미지는 말이 없고, 그렇게 침묵하는 이미지의 메시지를 우리는 읽어내야 한다. 

 

현대미술이 작가의 미학적 입장에 따라서 전통적이거나 보수적이거나 또는 전위적이며 실험적이거나 아니면 이상적이거나 속물적이거나 작가의 창작의 태도와 비전이 달라지지만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이 부닥치는 지점이 바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나 변화에 대한 직접적 반응(소위 반영이론에서 말하는)을 보인다는 것의 어려움이다. 어떤 배운 지식으로 또 선배 예술가들의 위대한 예술적 모색도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상과 현실의 비극적 사태 앞에서는 무력하게 ‘느껴진다’. 이 무력감, 이 패배감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도망치지 않고 담대하고 마주하고 가슴으로 공감하며 극복할 수 있을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송창애 작가는 이미 2004년 이라크 전쟁포로들을 가두고 고문했던 미국의 아부 그라이브 포로학대 사건을 충격적으로 경험하였다. 또 그 경험을 하나의 예술적 보고서로서 기록하듯 드로잉 연작을 제작했다. 발가벗겨진 채 쌓아올려진 이라크 포로들의 이미지는 인륜성의 가장 비극적 패배였던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을 내팽겨 쳤을 때, 또 그것을 바라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떨어져버리는 경험은 작가에게는 치욕적인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작가는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다.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예술의 비전은 여전히 유의미한가. 내가, 내 예술이, 내가 만난 사람들과 함께 어떤 분명한 비전과 진실을 담아낼 수 있을까.

 

물방울, 물의 흐름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어라. 천개의 이미지는 만물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것은 만물의 진실이자 만인의 진실 된 감정을 은유하기도 한다. 타인의 얼굴이 곧 ‘신(神, 진실)’의 얼굴이다. 타인의 일상과 현실은 나와 세상을 포함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세월호와 같은 사건들은 예술가들이 평소의 예술적 입장과 활동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사건들이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이 작가들의 강한 집중력과 예민한 감각과 함께 공동체와의 공감과 소통의 능력이 발휘되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비상한 시국에는 비상한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작가들은 각자 나름의 비상한 감각과 지혜를 발휘해 예술가로서 철저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 존속하는 정체성이 긴장상태에서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게 된다. 사건들은 예고 없이 다가오고 작업은 작가가 예측한 적 없던 곳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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