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꽃의 비경, 그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조관용 미술평론가, 2022 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
연민일까. 아니면 안타까움일까. 송창애 작가의 예술 행위는 우리 주위에서, 그리고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보며, “인간이란,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일들은 나와는 무관한 것일까?”라는 근원적 질문에서 출발한다. 아직도 우리 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철학 이론들은 나와 대상을 분리하고, 그 대상들을 관찰한 자료들을 기반으로 인간과 자연의 모든 것들을 설명하는 가설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한 이론들은 대상에 대한 관찰에서부터 출발하여 나와 우주 만물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기에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대상을 관찰하는 기구들이 발전하면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하는 가설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러한 가설을 마치 종교의 경전과 같이 서구에서는 근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원리라고 여기며, 그러한 원리를 기반으로 인간과 자연의 모든 것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 사회는 그러한 원리를 수용하여 교육 및 사회 전반 체계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가설의 오류들은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관찰 기구들이 발전됨으로써 수정되고 보완될 거라고 하지만 그 오류들로 비롯된 일련의 사건들은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이와는 달리 천부경(天符經)이나 중국의 노장(老莊) 사상이나 인도의 브라만(Brahman) 학파, 서구의 플라톤(Plato)이나, 신지학(Theosophy)의 이론들은 나와 내가 마주보는 대상들을 분리하지 않으며, 나와 마주보는 대상들이 일체라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나의 행위들은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원리를 기반으로 출발하고 있다. 나와 일체가 하나라는 이론은 자칫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없어 관념적인 이론에 불과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으나,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신성, 상징, 예술』이나, 또는 블라바츠키(H.P.Blavasky, 1831~1891)의 『침묵의 소리』에 의하면 개인의 실천적 행위를 동반할 때 그 숨겨진 이론적 베일을 하나하나 벗겨내며, 근원적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음을 전하고 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신성, 상징, 예술』에서 나와 마주하는 대상들과 일체가 되기 위해서는 입문 행위를 통해서 이며, 그 입문 행위는 자신의 이전의 에고를 탈해체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블라봐츠키는 『침묵의 소리』에서 나와 대상들이 일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대의 혼의 정신이 이해할 수 있기 전에 개성의 싹을 잘라 없애야 하고, 그대 혼으로 하여금 고통의 모든 울부짖음에 귀 기울도록 해야 한다.”1)고 말하고 있다. 이들 이론가들의 인식 방법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근원적으로 개인의 이기적 자아(ego)를 해체해야 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연민도 안타까움도 아니다.
그것은 연민도 안타까움도 아니다. 송창애 작가의 예술 행위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명상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면 나와 대상을 분리시키는 패러다임이 주도하고 있는 시대에서 나와 마주보는 대상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치열하게 전개시키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그의 예술 행위들은 <Water Odyssey: Mirror, 2023>는 물론 <Mass-universe II, 2007>를 비롯한 Mæss의 연작들, 그리고 <천개의 눈물과 천개의 일상, 2015~2017>의 프로젝트의 궤적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와 내가 마주보는 대상은 나와는 다른 실체가 아니라 나와 동일한 하나의 실체라는 사유로 확장해가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된다.
그의 작업들은 2004년 이라크 전쟁 당시 전 세계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아부 그라이브 포로학대 스캔들(Abu Graib detainee’s scandal)의 사진을 차용한 Mæss Land의 일련의 작업들이나, 또는 세월호의 비극에서 발단이 된 <천개의 눈물 & 천개의 일상>의 프로젝트를 보면 정치성을 지닌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지닌 작업으로 보일 수 있다. 특히 Mæss Land의 작업은 일견 심상용(미술평론가)이 “인간과 문명에 대한 강력한 의구심”2)을 제기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는 글이나, 또는 박기웅(미술학 박사)이 “통치자들의 이기심이나 대중들의 이기적 심리를 복합적으로 고발한다.”3)고 이야기하고 있는 글에서 보듯이 사회비판적인 요소를 지닌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들은 착취, 폭력의 참상, 끔찍한 절망을 지닌 사회적 이슈를 담고 있을지라도, 그 사회적 이슈들은 김가현(미술공간 현 실장)이 “착취, 폭력의 참상, 끔찍한 절망을 덤덤하고 무심한 시선으로 모사하면서 자신의 노출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냉소가 없다. 어느 정도 그녀의 자화상이며 참회록이다.”4)라고 말하고 있는 글이나, 또는 <천개의 눈물 & 천개의 일상>의 프로젝트에서 김노암(아트스페이스 휴 대표)이 “시대의 비극적 사건을 자신의 내면의 사건으로 수용한다.”5)고 이야기한 것처럼 그러한 사건들이 자신과는 무관한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로만 묘사하고 있지 않다.
Mæss Land의 일련의 작업들의 시간적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벌거벗은 인간 신체들은 <Mass-cloud, 2008>의 연작들이나, <Mass-coast, 2008> 또는 <Mass-spore, 2008>, <Mæss_Portal, 2011>, <Mæss_山, 水, 火, 風>의 작업들에서 보듯이 자연의 물체들로 점차 변형되면서 <MASS-nabula, 2009> 또는 <MASS-passage I, II, 2009>, <Mass_mulgyul, 2012>의 연작들, <Mass_sansoogyul, 2012>의 연작들에서 보듯이 자연의 실체들과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Waterscape>의 연작들과 <Water Odyssey: Mirror, 2023>의 작업은 Mæss Land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물이라는 메타포를 통하여 생명의 본질과 존재의 원형에 대한 시각적 고찰을 다룬다. 주관과 객체, 관념과 현실, 물질계와 정신계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항 대립적 관계로부터 벗어나 바깥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되는 비분별지의 세계를 어떻게 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드러낼 수 있을까?”6)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나와 마주하는 대상들이 하나라는 것을 그려내고 있다.
비경의 세계로의 탐험, 그것의 시작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나와 내가 마주하는 대상들이 하나라는 입장이 과연 온전하게 수용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아마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외면당하거나, 아니 어쩌면 유물론자의 관점으로 죽으면 모두 흙으로 돌아가니 똑같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정신과 물질이 어떻게 동일하냐고 과학적으로, 또는 그 밖의 다른 것으로 검증해보라고 요청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우리의 정신과 물질을 양자물리학에서 설명하는 입자와 파동의 이론을 차용하여 설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을 통해 설명하다보면 그것은 언제나 궁색한 답변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특히 예술창작자들에게는. 우리는 미시세계가 아닌 거시세계를 살아가며, 파장이 아닌 입자가 가득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Waterscape 작업은 송창애 작가에게 있어서 하나의 구원처와도 같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Mæss Land 작업과 Waterscape을 양자역학의 관점을 빌어 해석하자면 Mæss Land 작업이 덩어리(입자)를 통해 인체 덩어리와 자연의 물체들이 하나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였다면, Waterscape 작업은 우리 안의 에너지(파장)를 통해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카오스로부터 움트는 생명의 에너지들의 흐름을 보는 것과도 같은 그의 Waterscape의 일련의 작업들은 에어브러쉬와 그 밖의 재료들을 혼합한 창작 기법을 통해 엘리아데의 『요가-불멸성의 자유』에서 자연의 모든 것들이 “브라흐만(인도 신화의 신(神))에서......기(氣)로, 기(氣)에서 공기가, 공기에서 불이, 불에서 물이, 물에서 토(土)로”7) 생성되어 나오는 구절을 연상시키며, 창작 과정을 통해 고충환(미술평론가)이 “안료 층이 채 마르기 전에, 그래서 바람과 안료가 여전히 상호 작용하는 동안에 재빠르게 그려져야 하고, 그래서 일단 시작을 하면 한 번에 끝내야 한다. 유독 작가의 그림이 다작인 이유를 알겠고, 덩달아 고도의 집중력과 직관력이 요구되는 것임을 알겠다.”8)고 평론하는 글에서 보듯이 수도자의 수행의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거시세계에서 미시세계로, 입자(덩어리)에서 에너지(파장)로, 가시적인 세계에서 비가시적인 세계로, 전달에서 체험을 통한 소통의 세계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송창애 작가가 “한 두 개도, 열 개도, 백 개도 아닌 천 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간 홀로 눈물을 흘렸다.”9)고 말하며, 3년 동안 일기를 쓰듯 1,000개의 물방울을 그린 <천개의 눈물 & 천개의 일상>의 프로젝트는 마치 블라바츠키의 『침묵의 소리』에서 이야기하는 “고통 받는 자의 눈물을 그대 자신이 닦아내기 전에, 강렬한 태양으로 하여금 단 한 방울의 고통의 눈물이라도 마르게 해서는 안 된다.”10)고 하는 구절을 상기시킨다.
<Water Odyssey: Mirror, 2023>의 인터렉티브 작업과 <Waterscape 2303, 물꽃, 2023>,의 작업은 Mæss Land의 일련의 작업과 Waterscape의 작업, <천개의 눈물 & 천개의 일상>의 프로젝트로 이어진 20여년의 창작의 이념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의 작업은 소통으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그것은 입자적인 세계의, 에고 중심적인 세계의 소통이 아니라 파장적인 세계로의, 즉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 순간 시공을 통해 펼쳐지는 그의 작업 <Water Odyssey: Mirror, 2023>의 전체적인 작업들의 의미들이 하나하나 가슴에 스며들지도 모른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날의 파란 하늘을 연상시키는 <Waterscape 2302, 물꽃, 2302>의 짙푸른 색. 그것은 우울보다는 칸딘스키가 말하는 원초적인 그리움의 색일지도 모른다. <Waterscape 2303, 물꽃>의 작업에서 Mæss Land의 일련의 작업을 통해 친숙하게 다가온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흔적은 더 이상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고, 짙푸른 색들로부터 실핏줄과 같이 움터 나오는 하얀 색들은 마치 태양 빛을 받아 비상하는 것처럼 보이는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의 <공간 속의 새, 1926>의 모습이 어렴풋이 일렁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업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한국화의 전통적인 조형 이념에 토대를 두고 출발하고 있지만 20여년에 걸친 그 자신만의 독창적인 실천적 창작 행위를 통해 동․서양을 구분하지 않는 현대 미술 이념으로 새롭게 재해석하고 있으며, 영혼의 물꽃과 같은 신비스러운 풍경을 펼쳐 보이고 있다.
1) 헬레나 P.블라바츠키, 지두 크리수나무르티, 마벨 콜린스, 운명의 바람 소리를 들어라, 책읽는 귀족, 2017, p.97.
2) 송창애, 송창애 2012 도록,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2012, p.15.
3) 같은 책, p.14.
4) 같은 책, p.22.
5) 송창애, 송창애 2017 도록, 태산인디고, 2017, p.88.
6) 송창애, 송창애 2015 도록, araart, 2015, p.4.
7) 엘리아데, 요가-불멸성과 자유, 정위교 번역, 다르마총서, 1989, p.272.
8) 송창애, 송창애 2015 도록, araart, 2015, p.7.
9) 송창애, 송창애 2017 도록, 태산인디고, 2017, p.13.
10) 헬레나 P.블라바츠키, 지두 크리수나무르티, 마벨 콜린스, 운명의 바람 소리를 들어라, 책읽는 귀족, 2017, p.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