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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애, 풍경의 스펙트럼 : 하나의 풍경은 다른 풍경을 품고 있다

 

 

고충환 평론가

 

삶도 그렇지만 작업은 무엇인가에 대한, 무언가를 향한 모색의 과정일 수 있다. 설익은 의미와 모호한 형태를 부여잡고 의미가 또렷해지기를 기다리고 형태가 분명해지기를 기다리는 과정이다. 동물은 순간을 살고 인간은 시간을 산다고 했다. 순간의 지속인 시간은 그 속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개념으로서 인과론과 함께 자기반성적인 인간의 인문학적 발명품이다. 그 시간의 축에 순간을 위한 자리는 없다. 다만 밑도 끝도 없이 물고 물리는 반성과 인과의 과정이 있을 뿐. 그 희미하고 치열하고 지난한 과정을 통과하다보면 아주 이따금씩 불현듯 의미가 또렷해지고 형태가 분명해질 때가 있다. 경향성이라고 부르는, 아님 유형으로 명명되는 형식의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송창애의 그림은 이처럼 희미하고 치열하고 지난한 모색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매스 혹은 매스케이프로 명명할 만한 일련의 그림들에서 그렇게 의미가 또렷해지고 형태가 분명해진다. 매스케이프? 유기적인 덩어리 풍경이라는 말이다. 유기적인 덩어리 풍경? 모든 덩어리는 유기적이다. 부분과 부분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야 비로소 덩어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유기적인 덩어리 풍경을 어떻게 가시화하고 실현하는가. 사실 작가의 그림은 또렷한 의미와 분명한 형태가 무색할 정도로 그 의미도 흐릿하고 형태도 모호하다. 적어도 첫인상은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흐릿한 의미와 모호한 형태 위로 뭉실한 구름 같기도 하고 아득한 숲 같기도 하고 얼기설기한 잡풀이나 잡목 같기도 하고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알 수 없는 얼룩 같은 비정형의 풍경을 밀어 올린다. 

 

그리고 그림에 가까이 다다가면 반전이 일어난다. 알 수 없는 얼룩처럼 보였던 비정형의 풍경의 실체가 드러나 보이는데, 벌거벗은 사람들이 얼기설기 엉켜져 있는 살풍경이다. 자연 풍경인줄로만 알았는데, 아님 비정형의 얼룩으로 표상되는 심의적이고 관념적인 풍경인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살풍경이었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첫인상이 다르고 실제 그림에 직면했을 때의 인상이 다르다.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의 그림이 틀린다. 그렇다면 이처럼 자연풍경(구름이나 잡목 같은)과 관념적인 풍경(자동기술법의 흔적이며 무의식의 얼룩 같은) 그리고 여기에 살풍경(살덩어리 같은)까지 하나로 포개진 풍경의 레이어는 어떻게 왜 그려진 것이며 그 의미 또한 어떤 지점을 겨냥하고 지시하는가. 

 

그 의미? 살풍경이라고 했다. 그림의 의미론적이고 형태적인 씨앗 아님 원형에 해당할 이 살풍경은 원래 미디어를 통해 접한 아부 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이라크 전쟁 포로 이미지를 그린 것이다. 그 과정을 보면, 피라미드처럼 벌거벗은 채 포개져 있는 인간군상 이미지를 드로잉으로 옮겨 그린 후 복사기를 이용해 드로잉을 무한 복제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이미지를 화면에다 콜라주하고 연필과 먹(흑연)을 이용해 가필한 그림이다. 먹의 농담과 물감이 흘러내리면서 맺힌 자국과 같은 회화적인 과정으로써 살덩어리로 나타난 적나라한 재현적인 화면을 덮어서 가린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렇게 가림으로써 재현적인 상황논리(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는 오히려 더 잘 드러나 보인다(효과적으로 아님 전략적으로 노출된다?). 그렇게 그림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자연풍경 속에 숨은 살풍경이 보이고, 관념적인 풍경에 가린 사회학적 풍경이 보이고, 알만한 풍경의 이면에 예기치 못한 의외의 풍경이 보인다. 바로 중의적 의미이며 양가적 의미이다. 

 

이처럼 모든 의미는 겉보기와는 다르고, 그 자체 결정적이지도 않다. 언제나 하나의 의미는 다른 의미와 연결돼 있고, 때로 표면적인 의미는 자기와는 대극적이고 대차적인 의미에 연동돼 있다. 그렇게 전혀 상관없는 줄로만 알았던 자연풍경과 살풍경이, 사회학적 풍경 아님 존재론적 풍경이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삼투되고 있었다.

모든 존재는 하나로 연결돼 있다 

 

이처럼 매스케이프 연작에서 작가는 자연풍경과 살풍경이, 관념적인 풍경과 사회학적 풍경이 하나로 연동된 경계 위의 풍경을 그린다. 그 경계는 또렷하기보다는 흐릿하고, 결정적이기보다는 가변적이다. 이런 경계의 풍경을 그리면서 비록 자신의 그림이 표면적으론 자연풍경을 그린 것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서 어떻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풍경에 연결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서 어떻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발언의 한 형태일 수 있는지를 예시해준다. 그리고 근작에선 의미론적으로나 형태적으로 존재와 존재가 하나로 연결돼 있고 연동돼 있다는, 상대적으로 더 보편적이고 존재론적인 사실의 인식에 이른다. 기왕의 그림에서 예시되어졌던 인식, 이를테면 자연풍경과 살풍경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인식을 강조하고 극대화한 것이다. 

 

이런 인식을 주제화한 작가의 그림은 의외로 미디어 친화적이다. 전작에서 복사기를 사용해 콜라주할 그림을 무한 복제한 것이나 미디어에서 최초의 발상을 취한 것, 근작에서 붓 대신 에어브러시를 사용해 그린 것이나 사진과 회화적인 과정 내지 화면을 합성한 것이 그렇다. 전통적인 먹그림의 생리를 생각하면 꽤나 파격적인 형식실험이랄 수 있겠다. 특히 에어브러시를 사용해 그린 그림이 결정적이랄 수 있는데, 검게 칠한 바탕화면을 바람을 이용해 지우는 과정을 통해서 원하는 형태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따른다. 회화적으로 지우개 소묘나 백묘법 그리고 암화기법의 변주 정도로 볼 수가 있겠다. 여기서 칠흑 같은 바탕 화면을 무의 메타포로 본다면, 무에서 유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며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그 자체가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유래한 것으로 보는 우주의 기원신화와도 맞물리면서 우주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차원으로까지 확장되고 심화된다. 

 

그렇게 주로 구름과 바다 이미지가 그 경계 너머로 몸을 섞는 산수풍경(아마도 태초의 풍경이 그랬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원초적인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을 보여주고 있는데, 흡사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수면에 이는 잔잔한 파도나 격랑을 떠올리게도 하고, 수면에 일렁이는 빛 여울을 보는 것도 같다. 보기에 따라선 산수풍경을 찍은 사진의 네거티브 이미지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만큼 의외의 정치한 묘사가 돋보이는데, 아마도 에어브러시를 사용한 부드럽고 유기적인 선묘 탓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라인 바깥쪽으로 흘러내리면서 맺힌 미세한 얼룩이며 자국이 에어브러시가 만든 유기적인 선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질감을 연출해 보인다. 대개는 모노톤의 화면이 장식적이고 정적이고 관념적 내지는 관조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보이면서, 풍부한 중간계조를 함축하고 있는 화면이 단순한 시각적 경험의 차원을 넘어 부드럽고 촉각적인 성질을 암시한다. 

 

아무래도 풍부한 중간계조를 함축하고 있는 모노톤의 화면 위로 부각되는 부드럽고 유기적인 라인이 특징이랄 수 있을 것인데, 그 선이 어우러져서 구름과 바다가 경계를 허무는 풍경을 화면 위로 밀어 올린다. 그러면서도 그 풍경은 감각적 닮은꼴을 겨냥한 재현적인 풍경으로서보다는 자기 내면의 관념을 투사한 내면적인 풍경이며 관념적인 풍경처럼 보인다. 풍경으로 하여금 내면이며 관념의 표상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런 만큼 풍경은 분방한 기의 흐름이며 에너지의 표출을 연상시키고, 자연의 결이며 바람의 결, 시간의 결이며 숨결 같은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존재의 결을 상기시키고, 상호 이질적인 계기와 계기들이 하나의 층위로 겹치고 포개진 존재의 레이어를 떠올리게 한다. 변화무상하고 천변만화한 자연과 존재의 생명력을 암시하고, 생성과 소멸을 순환하고 반복하는 존재의 원리로서의 파동이며 파장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파동이며 파장을 매개로 존재와 존재가 연결되고 연속된다. 그 파동이며 파장을 전통적인 미학적 덕목으로 치자면 기운생동 중 운에 가깝다. 

 

대비되는 문법도 확인되는데, 가로나 세로 화면 중 일부를 순수한 추상화면에 할애해 재현적인 아님 관념적인 형상을 표현한 화면과 상호작용하게 했다. 조형의 일부로서 차용된 기하학적 추상화면과 에어브러시로 그린 유기적인 화면이 서로 대비되면서 조화를 이루게 한 것이다. 이런 모노톤의 화면과 함께, 더러 그 화면 위에 노랗고 빨갛고 파란 원색을 전면적으로 덧입히기도 하는데, 그 색채감정이 흥미롭다. 셀로판지와 같은 투명하고 맑고 깊은 색감이 암실에서 사진을 현상할 때의 빛의 질감을 연상시킨다. 내면의 빛(이를테면 카라바치오와 렘브란트 같은)과 외광파(인상파와 같은), 조명과 같은 인공의 빛(팝아트에 연유한) 이후에 전혀 다른 종류의 빛의 질감을 감지하고 적용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작가는 이런 형식실험의 지점 지점들을 매개로 감각적 재현(이를테면 구름이며 바다 같은)에서부터 내면의 메타포(이를테면 생명력의 분출이나 기의 흐름 같은)에 이르는 풍경의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일종의 내면풍경이며 심의적인 풍경을, 존재론적인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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