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ERSCAPE

 Flowing ... Growing ... Blooming

 

 

워터스케이프는 ‘물 풍경’ The Scpae of Water과 ‘물水로 그린 물物’ Things Drawn with Water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012년 이후 나는 실제 흐르는 물을 매질로 삼아 존재와 세계에 대한 실체를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시각적 산물로써 체현하는 워터스케이프 연작을 탐구하고 있다. 즉, 물은 모든 워터스케이프의 소재, 주된 표현기법, 그리고 그 안에 함축된 의미를 모두 담는 하나의 그릇이다. 나는 물을 분사하여 강한 수압의 차로 바탕색을 ‘지우고 씻어내는’ 나만의 고유한 조형방식을 창안하고, 워터드로잉 Water-drawing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근본적으로 ‘내용에 부합하는 형식의 구현’이라는 나의 예술정신에 기초한 것이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로 상象을 그림으로써 삶과 예술, 존재와 세계 사이의 간극을 소거하고, 물 자체가 지닌 속성들(생명성, 정화성, 응집성, 중화성 등)에 기반한 새로운 미적 가치의 구현에 중점을 두었다. 다음은 나의 삶과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사상들이다. 

 

 

I.           물로써 세계를 보다 (以水觀之)     

 

이수관지는 ‘물로써 세계를 본다’는 뜻으로, 나의 예술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뿌리이자 미학적 관점을 드러내는 주요 사상이다. 이는 도道를 천지만물의 근본 원리로 삼아 도로써 세계를 바라보고자 했던 노장의 이도관지以道觀之로부터 비롯되었는데, 나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실체의 세계를 물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통찰하고, 실제 흐르는 물을 매개체로 조형적으로 탐구하고자 하였다. 

 

II.           물과 내가 하나가 되다 (水我一體) 

 

수아일체는 ‘물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써, 이는 워터스케이프의 조형방식과 창작태도와 관련된 개념이다. 나는 워터드로잉 기법을 통해 물과 혼연일체가 됨으로써 내용과 형식을 합일하고, 생명체로서의 물 자체가 지닌 속성을 빌려 생명의 본질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는 신인묘합神人妙合에 의한 조형적 구현을 미적 이상으로 삼았던 전통 한국미학에 근거한 현대적 조형어법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흐르는 물로써 변화무쌍한 만물을 그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나 자신 또한 물처럼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III.      물이 흐르고 꽃이 피다 (水流花開)

 

수류화개는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는 뜻으로, 삶과 존재와 예술에 대한 나의 궁극적인 미의식과 미적 이상을 유비적으로 나타내는 개념이다. 이는 소동파의 ‘십팔대아라한송十八大阿羅漢頌’ 중 아홉 번째 아라한에 나오는 문구로써,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만물은 스스로 자기 존재를 성립시키며 저절로 움직인다는 우주자연의 섭리를 함축하는 말이다. 모든 존재는 물과 같이 끊임없이 흐르며, 궁극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생의 에너지를 품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는 것은 아닐는지. 짙푸른 심해에서 피어오르는 맑고 투명한 물꽃은 불완전한 존재의 완전성에 대한 그리움이자 순수 본성회귀에 대한 나의 표상이다.  

 

 

본 작품집은 ‘워터스케이프 I’로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약 6년 동안 창작한 작품들을 모아 선별한 것이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물결–물풀–물꽃> 이라는 비교적 또렷한 소재론적, 조형론적 변화와 더불어 <흐르다–자라다–피어나다> 라는 점층적인 의미의 변모를 수반하였다. 나는 이러한 자연스런 조형적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유동하는 물의 생명성과 변화성, 그리고 정화성에 기반한 실존적 자아의 원천적인 성장욕구와 순수 본성회귀를 향한 힘에 대하여 탐구하고자 하였다. 

 

‘워터스케이프 I’의 작품들은 존재에 대한 자율성에 중점을 둔, 좀 더 주관적이고 내밀한 감각적 경험의 산물들이라 할 수 있다. 즉, 세계에 대한 타자성의 개입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존재와 세계에 대한 사변적 선지식이 아닌, 나의 몸으로 직접 체험한 감각적 실체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좀 더 나아가 물질로 잠식된 이 시대에 물을 통한 새로운 미의식과 미적 가치를 제시함으로써, 감히 진정한 자아의 해방과 자유에 대한 화두를 던져보고 싶었다. 

 

FLOW

물결이 흐르다

“만일 나의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 있다면”

 

 

속은 텅 비고 홀딱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현기증과 구토증세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지 않았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허망함은 하늘을 치솟았다. 그림은 고사하고 숨조차 쉬기 버거운 가운데 욕망 없는 삶이 얼마나 무력하고 두려운 일인지 그때 절감했다. 맹목적인 인간적 시간과 일상으로부터 탈피해 평소 잘 마시지도 못하는 깡소주를 매일 보름 간 목구멍에 들이붓다시피 하며 쉰 소리가 날 때까지 끄억끄억 울다 잠이 들곤 했다. 2012년 5월. 그렇게 나의 삶과 예술세계의 두 번째 붕괴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10여 년간 미국에서의 이방인의 삶을 접고 귀국 3년차 즈음이었다. 당시 박사과정 중 이었는데, 머리가 커질수록 공허해지는 마음과, 현실과 이상의 불협화음으로 고통스러웠다. 2004년 이후 겪은 또 한번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균열로 삶과 예술의 간극은 더욱 벌어지고, 나는 더 이상 내 삶의 능동적 창조적 주체가 아닌 예술을 위한 도구처럼 느껴졌다. 창작행위의 기본적인 유희와 자유는 점점 잃어가고 역사주의와 시장주의라는 무거운 짐들이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왜 계속 그리는가’라는 깊은 회의감에 빠지며, ‘나와 세계의 존재론적 원형은 무엇인가’라는 매우 근원적인 주제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단 한 가지를 스스로 다짐했다. ‘예술의 자율성을 담보로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기만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 만일 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 없다면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내려 놓겠노라’고.

 

나의 삶과 예술세계에서 물을 만난 것은 진정 행운이었다. 그야말로 물결이 흐르기 전까지 나는 심히 암흑 같은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텅 빈 캔버스 앞에서 울먹이던 2012년 여름 어느 날,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근질거림과 가슴 속에서 출렁이는 묘한 기운에 휩싸여 나는 즉흥적으로 하얀 캔버스 전면을 흑연으로 시커멓게 도포했다. 그리고 공기압축기로 바람(이후 물로 전환됨)을 일으켜 흑연을 지워 하얀 본바탕을 드러내며 무언가에 홀린 듯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약 1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미처 예기치 못한 낯선 풍경과 대면했다. 휘몰아치듯 역동하는 검은 물결의 파동이 온 공간에 진동하고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물은 그렇게 밖으로 향하던 나의 시선을 내면으로 이끌며 막혔던 나의 숨통을 ‘툭’ 터 주었다. 그동안 나를 분열시키던 모든 이항대립적 개념들(주체와 객체, 관념과 현실, 현상성과 현존성 등)의 틈 사이로 물이 스며들며, 나는 비로소 나의 존재와 세계를 좀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이내 물을 통한 새로운 미적 가치와 미적 이상을 재구축하게 되었다. 흐르는 물결은 나의 영적 호흡과 실존적 행위에 따른 부산물이자, 내 자신이 미처 가늠할 수 없는 그 어떤 궁극적 차원과 원형적 존재에 이르게 하는 웜홀과도 같았다. 

 

 

GROW

물풀이 자라다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존재를 성립시키고 상승시키는 원초적 욕망과 힘이 있다면” 

 

 

그야말로 봇물이 터진 양 한동안 끊임없이 물줄기가 흘러 나왔고, 급기야 ‘멈출 수 없기에’ 그리는 식이 되어 버렸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마치 한판 굿이라도 한 듯 진이 빠져 단잠에 들곤 하는데, 이런 것을 두고 삶의 아이러니라고 했던가. 모든 것을 내려놓자 가장 본질적인 하나, 물을 얻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살아났다.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물의 속성은 기본적으로 나의 타고난 기질 및 성정과 궁합이 잘 맞았고, 물은 나와 타자/세계를 잇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흐르는 물로 형상을 그림으로써 주체와 객체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완성된 이미지보다는 창작 과정과 행위에, 이성보다는 직관과 본능에 좀 더 충실하게 되었다. 텅 빈 줄로만 알았던 가슴 속에서 무언가 원초적 욕망이 꿈틀대고, 나는 그저 직관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하였다.  

 

애초에 세계의 재현적 모방이나 낭만주의적 표현주의는 나의 관심 밖이었다. 대신 나는 내용과 형식을 합일할 수 있는 나만의 고유한 조형어법의 탐구에 몰두하였고, 이것이 내가 ‘왜 궁극적으로 물水로써 물物을 그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즉, 물은 나에게 소재이자 표현기법이고 동시에 그 자체로 의미이며 정신이다. 본디 사물을 대상화한다는 것은 나와 타자를 둘로 쪼개고 분리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고는 차이를 강조하는 서구의 분화주의적 이성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으로써, 통합론적인 일원주의를 강조하는 전통 한국사상과 미학에 근거한 나의 미의식과는 괴리감이 컸다. 

 

일찍이 나는 동양회화사를 통틀어 최고의 정수로 꼽히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의 미학에 관심을 둔 바, 이를 현대적 조형언어로 새롭게 모색하고 계승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기氣란 무엇인가? 나는 왜 그 수많은 동양의 사상가들과 화가들이 그토록 기에 집착하였는지, 그들의 세계관과 우주관의 근원은 무엇인지, 나아가 그러한 사유와 시선의 바탕에 깔린 우리만의 고유한 미의식과 미적 감수성의 근거는 무엇인지가 궁금하였다. 한국미학의 특징 중, 특히 나는 ‘신명과 평온’이라는 두 키워드를 중심으로 수아일체水我一體에 의한 신인묘합神人妙合의 조형적 구현에 몰두하였다. 물의 속성 자체가 지닌 양가성, 즉 동중정動中靜에 근거한 생명력이 충일하되 고요한 공간을 창출함으로써 사색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비가시적 세계의 본질을 구현한다는 것은 침묵에 의한 원초적 소통과 같이 비즉각적이고 불명확하다는 점에서 난해함을 전제한다. 그러나 존재와 세계에 대한 깊은 사색을 유도하고, 우리 가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참 본성에 작은 파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물결은 나의 숨결이자 물의 숨결이다. 흐르는 물과 함께 흐르노라면 나는 어느새 물 위에 올라타 물의 호흡과 하나가 된다. 온몸의 감각은 해저에서 흐느적거리는 해파리마냥 이완되고 가팠던 숨도 차츰 평온해진다. 흐르는 물의 강한 수압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조금이라도 인위가 앞설라 치면 소위 삑사리가 나는데, 가필과 수정이 불가능한 물 드로잉의 특성상, 선이 한번 어긋나면 그림을 버린다. 그래서 물은 나에게 수양과 정화의 도구이기도 하다. 물이 ‘쏴’하고 흐르면 나는 세상 모든 소음과 잡념으로부터 단절되고, 흐르는 물소리에 온 마음과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면 어느새 요동치던 내면의 파동이 잔잔해지고, 마치 흐르는 물소리로 영혼의 샤워를 하듯 마음의 결이 순화됨을 느낀다. 그렇게 나는 물과 함께 흐르는 것만으로도 맑고 충만한 희열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반면, 물풀은 나의 내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근원적인 욕망에 대한 표상이다. 물결이 흐른 뒤 2여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무언가 새로운 기운에 전이라도 된 듯, 한동안 수평적으로 평온하게 흐르던 물의 기운 속에서 중력을 거슬러 위를 향해 솟구치는 강한 힘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평소 특별히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창작과정 중에 일어나는 조형적 변화들에 집중하는 나는, 처음 물결이 흐를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흐르는 물을 따라 직관적으로 반응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물풀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그 형상들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실같은 선들이 뭉치고 흩어지는 가운데 무언가 새로운 생명체를 형성하듯, 원초적인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강한 생성의 힘이 발산되었을 뿐. 춤을 추듯 푸른 물 속에서 유영하는 물풀들은 리좀처럼 자유로운 방향성을 띠며, 흔들리고 흐르는 상태를 통해 탈영토화를 꿈꾸는 순수자아의 자유의지에 대한 표출처럼 느껴졌다. 인욕과 인위가 사라진 순수 본성 그대로의 상태, 즉 절대자유를 꿈꾸는 모든 존재의 의식의 심층에 깔려있는 가장 깊고 근원적인 욕망의 힘, 그것이 내 안에서 스멀스멀 자라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BLOOM

물꽃이 피어나다

 

“불완전한 존재의 완전성에 대한 

그리움과 본성회귀에 대한 표상이 있다면”

 

어떤 대상을 특별히 욕망하거나 사유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자 물결과 물풀이 순차적으로 흘러 나왔다. 돌이켜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당시로써는 의아하고 신기했다. 과연, 다음에는 무엇이 흘러나올까. 나는 타고난 본성과 직관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물이 이끄는 대로 흐르니 만사가 한결 평온하고 순조로워졌다. 우주자연의 이치가 이런 것일까? 존재의 본질이 이런 것일까? 그동안 분열되었던 삶과 예술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마침내 나의 오랜 숙원이었던 창조적 행위에 의한 존재론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게 되어 무엇보다 기뻤다.   

 

물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리고 흘러 어딘가를 향向한다. 나는 물의 파동을 통해 늘 어디론가 향 하고자 하는, 나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그 원초적 힘의 근원이 궁금하였다. 우리는 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물결이 흐르고 물풀이 자라는 과정을 통해 나는 내 안의 식물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으로 치부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나는 나의 내밀한 욕망을 더욱 집요하게 응시하였다. 물은 계속 흐르고, 나는 그 흐름 속에서 나를 비롯한 모든 생명의 원천적 힘의 근원을 쫓기 위해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그러나 결국, 그토록 갈구하던 힘의 실체는 정작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것 이외의 지점에 맞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표면이 아닌 이면으로부터 드러나는 일렁임 또는 흔들림 속에 아주 잠시 드러나는 것일뿐.

 

좀 더 크고 깊은 곳을 향한 원초적 욕망의 물줄기를 타고 심연에 다다르자, 이내 푸른 빛을 머금은 한 송이 물꽃이 피어났다. 물결과 물풀 연작을 통해 주로 발산하는 역동적인 생명력과 자율감이 강조되었다면, 물꽃에서는 좀 더 집약되고 응축된 내면의 힘이 표출되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원은 자연의 순환성과 영원성을 상징한다. 원은 돌고 돌아, 처음 제 자리로 되돌아오는가 싶더니, 진폭과 울림이 점점 커지며 저절로 큰 원을 그리게 되었다. 원형의 푸른 공간에서 피어오르는 맑고 투명한 물꽃은 불완전한 존재의 완전성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과 순수 본성회귀에 대한 나의 표상이다. 모든 인간은 물에서 나서 물로 돌아간다고 했던가. 

 

하루는 신명나게 물꽃을 그린 후, 잠시 의자에 걸터앉아 작품을 감상하다가 깊은 단잠에 빠졌다. 얼마를 잤을까. 눈을 뜬 나는 순간적인 시공의 단절을 체험하였다. 잠들기 전, 도대체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하얗게 지워진 것이다. 뒤틀린 시공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과 함께 사방을 스캔하던 중, 나는 물속에서 갓 피어오른 듯 맑고 푸른 기운을 발산하는 물꽃과 눈이 딱 마주쳤다. 물꽃이 나를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나도 모르게 ‘아, ‘나’구나!’라는 나지막한 탄성과 함께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그날 나는 두 편의 시를 지었다. ‘물꽃’과 ‘본디 나’. 

 

 

물꽃 

송창애

 

우리는 모두
물꽃같은 존재다

물에서 나서 
꽃이 되어가는 과정

 

그러나 이도 잠시
온 힘을 다해 

물꽃으로 피어났다
다시 물로 돌아간다

 

무형에서 유형으로
그리고 다시 무형으로
변화와 순환만 있을 뿐

 

우리는 모두
물꽃같은 존재다

 

 

본디 나

송창애

 

나는 물을 통해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를 만난다
 

 

서로 다른 시공의 나는

물의 씻김을 통해 

비로소 하나로 응집하고

무한한 파동이 되어 흐른다
 

 

그 흐름 속에서 잠시

온전한 나를 만나곤 한다
 

 

늘 그리운 나

되돌아 가고픈 나

본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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